촉감적 정색
고연수 (미술 평론)
얼핏 보면, 으레 한 작가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보이지만 이번 전시는 작가 백인교와 이준의 작업이 어우러진 2인전이다. 경쾌하고 활기있는 분위기에 수더분한 조화는 두 작가가 공통으로 지닌 작업 방식에 기인한다. 작품들을 좀 더 면밀히 보면 분명 장시간 공들여 수작업으로 엮어낸 듯 보이는 실Fabric의 재료와 다양한 색Color들의 배치와 조합이 두 작가 작업에서 보여지는 유사한 형식이다.
산업혁명과 사진의 등장은 시각예술창작자들에게 당연했던 전통적 재료와 점잖은 주제로부터 자유로운 해방을 종용한 도화선이 되었고, 이 후 기이하지만 천차만별한 재료들이 시각예술안에서 재구성되어 폭발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중 실은 유약해 보이는 물성과는 또 다른 면모로 작가들에 의해 많은 사연을 함유한 채 깊고 내밀한 의미가 부여되어 다루어져 왔다. 루시 리파드Lucy Lippard가 언급한 설령 작업을 몰랐더라도 작가가 끊임없는 연결을 시도해왔기에 어떻게든 우리는 이미 그와 연결되어왔다고 한 에바 헤세Evs Hesse의 유기체적 조각이나, 거대한 상처를 품은 인간-자신-을 연약하고 부드러운 조각으로 전이시켜 강한 인간의 모습이 역설적으로 드러나는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설치작업들, 정성스럽게 실로 꿰매어 연결해 여타 도발적인 작업들과는 달리 보였지만 여지없이 속살을 뒤집듯 과감히 보여준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의 각종 천Fabric 작품들까지. 이들을 꿰어낼 수 있는 실이란 매체는 잇고 붙이는 행위의 과정을 포함한 상처 입은 인간 본성에 대한 치유와 그로인한 관계 회복을 의도한, 단순한 재료를 넘어선 매개체의 의미로까지 해석이 확대되어질 수 있다.
이번 전시도 물론 긴밀히 연결되고 있는 두 작가의 실 작업들의 명분이 분명하나 앞서 언급한 일련의 작업들에 비해 묵직한 부담감은 다소 덜어 내어주는 듯 하다. 서로간의 구분이 확실히 보이는 다양한 색들의 조합으로 제작된 작품들이 공간에 자유로이 선점하여 산재한 것이 한결 무거움을 환기시켜주는 부분이다. 유연하고 부드러운 수용적 성질의 매체가 실이라면, 색은 빛을 발하고 반사되는 지점들이 구분되어 다각도로 우리의 시지각을 자극한다. 응당 이러한 색-빛-을 가장 흠모하거나 지배하려했으며 최상의 적절한 조율과 타협에 온 신경과 영혼마저 바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색을 통해 외부와 통하고자 한 시각예술창작가들의 업이고 몫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실을 통한 색에 대한 두 작가의 접근과 다루는 방식, 그리고 해석은 좀 더 색 다르게 분석해도 좋을 듯 싶다. 작가 백인교의 작업은 공간을 수 놓듯 포근히 감싸는 내향적 가변 설치 작업으로, 수 놓아진 작가 이준 작품들은 빛을 발산시키는 반짝이는 외향적 조각 작품들로 공간을 채우고 있다.
이번 전시의 흥미로운 지점은 경쾌하고 발랄한 음률적 조화를 이룬 공간에서 감지되는 두 작가의 묘하게 벌어지는 확연한 지향점과 그 간극이다.
재료가 가진 고유한 성질을 거스르지 않고도 작가가 원하는 방향으로 추상시키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작가 백인교는 따듯한 실의 물성을 그대로 극대화시키거나 윤택한 색-빛-의 세라믹도 본인의 색감 온도로 차분히 가라앉힌다. 작가가 다채롭고 유한 '촉감적 색 공간'을 특히 마련해야하는 이유는 관망해야하는 작품이 아닌 관객이 작품 속으로 들어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하는 인터랙티브(Interactive, 관객참여)적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작품이 말끔히 마감된 결과물로서 관객을 맞아야하는 것이 아닌 관객의 손길과 몸짓이 작품에 가미되고 그것이 흔적으로 남아 수시로 변동되어야 하기에 그가 선택하는 재료들의 질감과 색감은 만지고 싶도록 마음을 일렁이게 해야 하는 것이다. 가변적이고 규모 있는 설치작업에 대부분 부드러운 탄성이 있는 실과 천의 재료가 쓰이고, 율동적인 색감으로 조합된 작업들에 관객의 몸과 마음은 유하게 동요되는 것이다. 재료 본연의 장점을 최대한 자아내기 위한 노력은 전통적 공예의 특성을 그대로 잇고 있는 반면, 관객과의 편안하면서도 매혹적인 관계를 위해 작가의 특유한 색감각을 창출하려는 시도가 부가되고 있다.
화려한 색상의 실로 빼곡히 감긴 인간․사물의 입체 작품은 손의 지문처럼 각기 다른 결, 그리고 각색을 띤다. 작가 이준의 작품을 감싼 형형색색의 실들은 스스로 밝힐 수 있는 최대한의 빛을 내고 있다. 심지어 검은색의 실 조차도 너무 어두워 빛이 나는 정도로. 작가는 인간이 갖고 있는 본능, 어쩔 수 없는 잔혹한 본성에 대한 이야기를 세심한 수작업의 조각으로 표현한다. 그렇다고 특별히 비관적이거나 절망적인 관점이 작업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는다. 심각해 보이는 곤경에 처한 타인을 목격했을 때 자신의 생존과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움직임조차 취하지 않는 인간들의 몸짓과 건조한 표정을 실과 색으로 풀어내고 있다. 일률적으로 수수방관하며 먼 산을 바라보는 찬란히 발색되는 군상, 이른바 힙하고 트렌디한 다소 버거워 보이는 (색)안경을 쓰고 있거나, 본능으로 지닌 감각을 애써 막고 닫아버리려는 행위들은 슬프도록 빛나는 본능으로 무장되어 창백한 인간으로 표현되고 있다.
에바 헤세, 루이스 부르주아, 트레이시 에민은 삶과 예술이 분리되는 것에 대해 과민한 반응을 보인 예술가들이다. 마음 속 깊이 덮어놓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깊은 상처의 통감은 예술을 통해 치유했고 이들의 작업은 외부세계와 타인과의 관계를 다시 연결시켜주었다. 그래서 작품에서의 '관계'와 '연결'은 단순한 키워드가 아니며, 삶과 예술이 구분되어서는 곤란한 정도가 아닌 일치해야하는 일종에 절박함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작품은 작품의 물리적 크기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묵직할 수 밖에 없다. 강압적이지 않으나 강하고 독단적이지 않으나 독자獨自적으로. 여기에 관통되는 매체는 물론 실이다. 무엇보다 아픔과 슬픔이 절망적이지 않은 이유도 매체가 지닌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호소력을 추출해 낸 시각예술가들의 뛰어난 조형적 감각의 언어 때문일 것이다.
실의 매체가 지닌 조형언어로서의 '관계와 연결'은 작가 백인교와 이준의 전시에 묵시적 분위기이며, 나아가 시각예술에서 전적으로 사용되는 도구인 색을 각자의 언어로 펼쳐 보이고 있다는 점이 이번 전시를 즐겁고 편안하게 관조하게하나 가볍지만은 않은 (공)감각으로도 목도해야하는 지점이 있다. 두 작가의 작업과 작품을 번갈아 마주하다보면, 관계와 연결의 의미는 단지 매체를 넘어서 은근하게 또 다른 화두로 상기될 수 있다. 두 작가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작품과 관객과의 거리를 요하는데, 그간 우리가 고수했던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거리과 관계와는 흐름을 달리하는 부분이다. 작가 백인교의 작업에서 주요한 '하모니'를 이루기 위해 관객의 심리․물리적 참여가 그러하고, 작가 이준의 군상이나 조각조각 이은 도자기 작품은 단지 관객으로부터 존중되어야 할 가시적 관람거리의 차원이 아닌 '감시자'의 시선과 정신적 거리를 암묵적이고 요구하고 있는 지점이다. 두 작가가 발랄하고 산뜻한 작업형상으로 관객과 녹진하게 연결되고자 바라는 관계로도 느껴진다.
실제 편안하고 즐겁게 체험하고 예술이 실제 놀이와 같은 평온함으로 체화되어 우리에게 온 감각으로 스밀 수 있다는 것, 아름답지 않고 손을 쓸 수도 없기에 마주하기도 꺼려지는 우리의 본능을 조형적 수작업으로 화사하게 되비출 수 있다는 것은 시각예술만이 우리에게 선사할 수 있는 특별하고 특유한 스펙터클일 것이다. 펼쳐진 광경의 스펙트럼의 진폭을 얼마나 자유롭게 누빌 수 있는지는 이제, 이들의 시각예술을 목도하고 있는 지금 우리의 몫이자 누려야 할 권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