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미상(作者未詳)
#1. 작자미상 1900년대
1997년 덥고 습했던 여름, 황학동 어느 골동품가게에서 우연히 발견한 한 다발의 빛바래고 곰팡이와 습기에 엉키고 달라붙은 3X5정도 크기의 흑백사진, 황량해 보이는 언덕위에서 작은 항구를 찍은 사진들에는 드물게 사람들의 사진도 있었는데 서양 여자 둘과 남자 세 명 그리고 양장을 하고 있는 동양남자 한명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뒷면에는 누군가의 사인인지 뭔지 모를 희미한 연필로 쓴 글씨가 날짜와 함께 상표 같아 보이는 작은 스탬프 옆에 쓰여 있었다. 나는 이 사진들이 알 수 없는 그 무언가를 내게 말하고 있음을 느꼈다.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듯 한 그 묘한 느낌, 심지어 나는 그 사진속의 날씨 햇살과 습도, 바람의 정도 그리고 향기 따위가 느껴지는 듯 했다. 이 사진을 찍은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불분명해 보인다. 이 사진들은 특별히 인물들을 위한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다 예술적 목적을 가지고 찍은 풍경사진이라 하기에도 그저 그런 것들만 잔뜩이다. 이 사진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날의 여러 소소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지만 이 사진의 의도나 사진사 자신에 관해서는 어떤 것도 남기고 있지 않다. 어쩌면 몇 안 되는 인물사진의 등장인물 중 하나일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도 없다. 사진과 그 제작자는 이제 완벽히 유리(遊離)되었다. 작자는 미상으로 남았지만 우리는 그가 그날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였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다. (마치 가족사진에 언제나 등장하지 않았던 아버지처럼). 비록 그를 볼 수는 없지만 그가 렌즈를 통해 보고 있던 것들을 바라보며 나는 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사진 속 예전의 그 사람들은 지금 나를 바라보고 있다. 골동품가게 한구석에 버려지듯 놓여 있던 그들의 존재는 다시 한 번 살아나 이제 나에게 찬란하게 빛났던 그들의 나날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2. 빛으로...점멸하다.
그가 프레임 속에 불러들인 피사체를 보면 도심이 아닌 한적한 시골풍경이며, 그마저도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 자연 풍경 그대로이다. 혹은 목책이나 묘지 그리고 허름한 촌락처럼 자연에로의 퇴화 과정이 상당할 정도로까지 진행되어져서 사실상 자연과 구별되지 않는 인공의 흔적들이다. 화면에서 흔적은 이런 인공의 부산물만은 아니다. 사람 역시 그 자체로서보다는 오로지 과거와 흔적과 부재의 형태로서만 암시된다. 작가의 작업은 이처럼 존재 대신 부재를 향한다. 과거의 한 순간에 거기에 사람이 있었음을 증명(암시?)하는 것이다.
- 고충환-2008년 김기태 개인전 "A Brief Story of a Forgotten Garden"서문 중 -
장면1.
푸르고 높은 하늘 아래 햇살은 따뜻하고 바람은 부드럽던 어느 날, 작은 언덕을 지나 보일듯 말듯한 작은 개울이 무성한 풀숲 사이로 지나가는 그 길가에는 그리 크지 않은 나무 한 그루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인적이 뜸한 이곳은 나름 소풍 나오기에 좋아 보이는 그런 풀밭과 그늘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으리라. 어쩌면 오래 전 어느 사랑하는 연인이 이곳에서 사랑을 속삭였으며, 또는 먼 길 가던 여행자들은 이 그늘에서 잠시 땀을 식히곤 했을 지도 모른다. 또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저 너머 들판에서 벌어진 어느 전투에서 큰 상처를 입고 도망친 한 병사는 이 그늘에서 떠나온 집을 그리워하며 가쁜 마지막 숨을 내쉬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여기에 그들의 달콤했던 속삭임, 지친 땀 냄새와 한숨, 그리고 희미해져가는 눈으로 허공에 마지막 손짓을 남겨 놓았다. 오랜 시간이 흘러 그들이 남긴 그 흔적들은 마치 그들의 아름다웠던 나날들을 보여주기나 하려는 듯 부드럽게 일렁이며 빛나기 시작했으며 일부는 부드러운 산들바람에 저 멀리 그날의 하늘 속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장면 2.
또 한동안의 시간이 흘러 모두가 떠나간 후, 이제는 더 이상 아무도 이곳을 찾지 않는다. 그렇게 그 모든 흔적들은 덮여지고 다시 무너졌다가 흩어져 서서히 사라져갔다. 어느 여름 큰비로 산사태가 나기도 했고 그 후, 내리 큰 눈이 쏟아지는 혹독한 겨울들이 이어졌다. 또 언젠가는 갑작스런 큰 바람에 몇몇 나무들이 뿌리째 넘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은 그 모든 풍경을 천천히 바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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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좋은 날씨는 참으로 오랜만이라 온몸으로 쏟아지는 햇살의 짜릿한 진동이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아까부터 떠돌던 작은 새소리도 어느덧 자취를 감춘 지 한참인 오후, 이제는 딱히 어디라 말하기 힘든 외딴 어느 자그마한 언덕 사이를 한줌 작은 바람이 지나간다. 아무도 다닐 것 같지 않은 이렇게 외진 곳에도 누군가가 다니는 길의 흔적이 있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다. 간혹 발견되는 작은 병 하나, 무슨 손잡이 같아 보이는 썩은 나무토막 등 이 길은 그렇게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게 인적 없는 오솔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세상과 멀어져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그야말로 물아일체가 된다. 바람이 되어 저 위에서 내려다보다가 나무가 되어 잠시 쉬어본다. 그러다 소리가 되기도 하며 또 햇살이 되어 이 들판에 지긋이 내려앉아본다. 그러다보면 평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 외딴 오솔길이 내는 소리, 향기 그리고 주변에서 올라오는 습기는 한데 모여 작은 오로라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저 너머 풀밭에서 홀연히 솟아 오른 한줄기 빛은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어디론가 뻗어나갔다가 이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