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찬수 그림 - 색채의 향연

 

최승훈 (전 대구미술관장)

 

황찬수의 그림은 색채의 향연이다. 다양한 색채는 자연스런 붓놀림에 실려 시시각각 변화하는 톤을 보여주며 화면 전체에 펼쳐진다. 대부분의 비구상회화에서처럼 원근법 등을 통하여 묘사하는 illusion을 배제하고 있지만 황찬수의 화면은 절대회화에서 강조된 평면이나 로드코의 색면추상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다만 공통점이라면 그림에서 구사할 수 있는 많은 요소들이 절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절제성은 단순한 외양을 만들기 위한 것이기 보다 그의 정신적 태도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여 진다. 그가 색채를 구사함에서도 깊이감을 찾는 것도 단순한 색채의 가시적 효과만을 위한 것이 아닌 정신적 차원에서 접근할 일이다. 또한 여러 색채가 조합하여 한 tone을 형성함으로써 보여지는 화면도 화면이지만, 그 화면 위에서 이루어지는 정연한 붓질 행위는 시간적 의미를 내포하는 음악적 연주라고 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황찬수의 그림에선 화면 전면에 동일한 리듬으로 균질의 색채들이 춤을 춘다.

 

그에겐 그림의 대상이 구체적인 사물이나 사건이 아니다. 단지 그림의 동기가 되는 조형충동이 일어나는 우연적 만남 즉, 작가가 만난 어느 시점에서의 정황이 출발점이 된다. 이 또한 직접 현장에서의 작업이 아닌 스케치나 사진 등의 기록에 의한 스튜디오작업을 하므로 순전히 기억에 의한 반추적 사유작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즉흥적이고 격정적일 수 있는 현장에서의 일차적 심리상태는 시간을 여과하며 성찰의 과정을 거쳐 보다 정제되어 나타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그림은 만남의 정황에 대한 자신의 심적 반응을 담아내는 것이다. 순수한 감성적 반응이며 타고난 음악적 감흥에 의한 연주를 이루는 것이다.

 

연주~! 그러나 그는 '형식' 자체를 거부한다. 의도적으로 만들어 가는 형식이라는 것을 경계한다. 이유는 물론 자유를 위해서이다. 그러한 틀에 얽매이는 것이 조심스러워서이다. 일반적으로 현대회화에서 주제와 형식이 작가 개인별로 뚜렷하게 부각된 점에서 비교하여 보면 황찬수는 의도적으로 이를 의식적으로 벗어나려고 애써 왔다. 그것은 일관적 주제와 틀이 가져올 수 있는 상투적 태도를 경계한 것일까? 또는 자연히 생성된 형식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자유로운 발상을 구속할 수 있는 얽매임의 관계가 더 많이 부담스러운 것으로 보여 진 것 같다.

 

황찬수는 끝없는 자유를 갈망하고 있고 작가의 활동은 자유로워야한다고 확신하고 있는 그에겐 반복되는 주제도 정형화하는 형식도 늘 경계의 대상이었을게다. 그래서 그에겐 표방하는 어떠한 틀이 없다. 한 때 그의 그림이 몇몇 애호가들로부터 높이 평가되며 '풀 작가'라는 명칭이 반복되어 들렸을 때, 그는 그 '풀 작업' 연작을 멈추고 오히려 멀리 하였던 사실은 이를 뒷받침하는 일화이다. 깔끔한 성격의 그는 과시하거나 요란스럽지 않다. 어디 나서려고도 하지 않는다. 돋보이는 짓도 안한다. 그의 소중한 자유를 위해서,,, 나는 그 자유를 지켜주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나면서 체질을 타고 난다. 취향이 그러하며 음색과 성격, 태도에서 남들과 다른 특징을 표출하기 마련이다. 그러하다보니 그에게도 그다운 체취가 묻어나는 그림이 형성된다. 이것이 필자가 말하려는 황찬수의 '결' 그림이다. 이 결이란 바람결, 물결, 숨결, 마음결 에서의 결이다. 섬세하게 다가가야만 감지될 수 있는 것으로 시각적 대상이 아닌 오감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무형의 대상이다. 이 결은 아주 근본적인 지점에 이어지는 개념이라고 설정한다면, 어느 가시적, 가촉적 대상을 두고 하는 예술행위가 아닌 황찬수의 경우에 해당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결'이라는 하나의 흐름을 가시화하는 과정에서는 제한된 물리적 공간을 극복하는 것이 관건이다. 황찬수는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한정된 공간 속에 그 흐름의 한 조각을 구획해서 보여주는 정도의 그림, 즉 시간의 한 부분, 공간의 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림으로 제시한다.

 

이 또한 '만남의 흔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날, 어디' 라는 구체적인 단서는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다만 그 흐름 속에서 떠낸 듯한 한 단편은 과거의 기억이면서 보는 시점에서의 현재, 그리고 미래의 어느 한 시점의 이야기도 될 수 있다. 이러한 개연성은 사소한 이슈나 일상적 담론, 사회적 관점에서의 주제가 아니며, 보다 보편적 감성의 지평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에서 가능한 개념이다. 그리하여 그의 그림은 어디에서 출발하고 어디에서가 끝인지 묻기 보다는 영겁의 시간 속에서의 결을 개인적 일상 속에서 무수한 만남을 통하여 쌓아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일반적 회화 화면에서 중심과 주변이 구별되는 것과는 달리 그의 그림은 가장자리에서도 균질한 화면을 지니도록 캔버스를 스트렛치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린다. 즉 벽면에 캔버스 천을 부착시켜 놓고 무엇에 걸리거나 멈춤이 없도록 붓의 흐름을 유지한 채 붓질한다. 즉 감정에 몰입하여 색채의 음악 연주를 하는 셈이다. 그 연주가 끝나야 비로소 캔버스를 틀 위에 올린다. 흐름의 한 부분이 보여지는 것이다.

 

나는 이번 전시회에서의 그의 작업을 '결 그림' 이라 불러본다. 그러면 그는 또 이 '결 그림'이라는 개념으로부터 또 바람결도 닿지 않는 먼 곳으로 멀리 멀리 떠나려 할 것이지만...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그런 태도가 이제껏 그를 만들어 왔듯이 앞으로도 그를 그답게 유지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