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DRAWING: SEOUL

18 March - 17 April 2021

하얀그리기

 

안두진 (작가)

 

언젠가, 그림과 그리기 모두 아름답기만 할 때도 있었다. 오래된 그리기의 시간만큼 하나의 주인공,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글쓰기, 하나의 그리기도 모두 짧은 회상처럼 흩어졌고 오늘의 예술적 요소인 이미지들을 도와주는 기억이 되었다. 아주 오래된 새로움과 함께 주저하는 동시대인의 갈등은 기억들을 끊임없이 소환하며 바로 '그리기'의 순간에 서있다. 이번 전시는 이 '그리기의 순간'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기적 사유

늘상 화가의 작업은 곤경에 처한다. 그런데 더 이상 그릴 것이 거의 없다거나 새로운 방법 또는 싸울 대상이 없어서가 아니다. 이미 '결정된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데 있다. 즉 화가의 곤경은 회화의 제재題材나 매재媒材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기의 사유에서 비롯된다. 사유란 단번에 찬반을 결정하지 않고, 오히려 은폐된 문헌학, 숨겨진 전통, 사유되지 않은 것, 잔존을 참조하여 동시대인에게 질문하기를 원하는 사유이다. 작가가 동시대인으로서 -상상력을 통해 -스스로 결정을 유보하는 것은 연대기적 예술체제 안에서 거대 서사와의 싸움뿐만이 아니라 과도한 역사와 제도 안에서 아련히 다가오는 작은 빛-몸부림, 저항-이다. 이것은 상품 전체주의 사회에서 새로움을 생산해야 하는 작가로서 중개자에 대한 모방 욕망에 대한 지연의 움직임이기도 하다. 따라서 동시대적 새로움이란 사건의 망각에서 비롯된 시간적 오차에서 벌어진 동화가 아니다. 복수의 사건-다른 시간들의 몽타주의 과정에서 발생하며 이질적인 것들의 겹침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다. 연대기적인 시간의 오차에서 벗어나 복잡하게 뒤얽힌 두께를 지닌 시간성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 상상력이야말로 몽타주적인 사유이며 그리기적 사유이다.

 

깜박거리는 이미지들

그리기적 사유는 물질적 공간 위에서 사유와 행위가 동시적으로 작용한다. 즉 이미지의 공간을 발견하고 이미지를 물질로서 사유하고 이미지를 따라 행위로서 사유한다. 이에 관해 디디-위베르만은 이미지는 사물이 아닌 행위이자 과정인 것은 영화나 사진, 회화 모두 행위와 분리 될 수 없는 선택적이고 편집의 행위로써 상상하고 이미지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미지는 상상력과 다른 것이 아니며 프레임을 통해 내부와 외부로 분화되고 감춤과 드러냄의 변증법적 운동이 수행된다. 행위로서의 이미지의 변증법적 운동은 부호적 특징을 가지며 프레임의 안과 밖, 사유의 안과 밖을 깜박거리며 넘나들며 상상을 지속시킨다. 여기서의 이미지의 행위적 성향이 사유와 맞닿아 운동하는 것이 상상이라고 한다면 이미지의 정확한 번역은 '그리기'일 것이다. 랑시에르가 이미지는 여러 기능이 있고 그 기능을 문제 틀에 짜 맞추는 것이 예술이라고 했을 때 '그리기'는 이미지의 사유적 행위의 기능을 말하는 것이다.

 

하얀 그리기: 자국에 관하여

화가에 이르러 그리기적 사유가 프레임에 깜박였을 때, 행위와 사유의 동시성은 (붓)자국을 남긴다. 행위를 전제로 하는 자국은 물질적 공간이다. 물질적 공간의 연속에서 감각이 출현한다. 물질로서의 자국에서 감각이 출현하는 이유는 (붓)자국 안에 작용하는 상반된 두가지 흔적들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이야기>로서의 흔적, 덧붙힘의 흔적이다. 벤야민은 이것을 도공의 손흔적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이야기꾼들의 연속되는 관계 속에서 덧붙힘이 지속되는 것처럼 한 번의 우연한 (붓)자국일지라도 이미지의 행위로 인한 물질성이 가지는 여백에도 연속된 관계의 관성이 지속되고 있다. 그 자국은 사유 속에 깊이 자리 잡은 시간의 일상을 비정형 상태로 거칠게 끄집어져 낸다. 자국을 남기는 사유의 행위가 반복될 때 (붓)자국 내의 흔적들은 이미지의 선택적 행위에 비롯하여 형상으로 접근하든 지 아니면 의식적으로 매제를 지향하든 지 어느 방향으로든 흘러넘치게 된다. 다른 하나는 연대기적 흔적, 제거의 흔적이다. 이것은 들뢰즈가 <감각의 논리>에서 말하는 '미리 주어진 구상적 여건들'과 관련 있다. 화가는 주어진 여건과 큰 싸움을 벌이는데 세잔은 이에 대해 판에 박힌 것들이라 칭하며 제거의 대상으로 여겼다. 연대기적 흔적은 제거의 대상을 제거하지만 그 방식에 대한 제거를 추가함으로 계속 덧붙혀 진다. 마네가 제거한 대상을 다시 복원 시키지는 않지만 마네의 제거의 방식에 새로운 방법을 추가하여 제거의 대상을 계속적으로 소환시킨다. (붓)자국에 남겨진 연대기적 흔적은 이렇듯 회화의 역사적 흔적들로부터 끊임없이 분리되고 제거됨을 추가함으로써 남게 되는 흔적-흉터이다. 따라서 하얀 그리기는 다른 양상의 두 흔적이 양립되는 모순의 동시성을 지닌다. 추가와 제거라는 양가적 성질은 모순적 관계로서의 동일성을 유지함으로 다른 자국들과 연계된다. 그리기적 사유가 프레임 안에서 깜박이고 자국이 사유와 흔적을 오고가며 물질로 나타날 때 화가의 갈등은 (붓)자국 하나하나에 연결되어 (+), (-)를 오고 간다. 이것은 재현과 반재현의 문제이거나 구상과 추상의 문제가 아닌 행위로서의 이미지가 화가를 통해 물질로 실현되는 작동의 문제이다.

 

화가가 화면을 직면 할 때 (붓)자국들은 목적과 방법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결과를 비평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 갈등은 늘 한 쪽으로 선택된 것처럼 보이지만 자국이 생겨나는 '지금 여기'에서는 그 어느 것으로도 선택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익히 자연스러운 것이고 오히려 '결정되었고 그래야만 한다'는 단호한 의지가 더 부자연스럽다. 전체와 목적을 위한 그리기가 아닌 그리기에 대한 입체성을 인지할 때 화가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방 욕망을 직시하고 서사시의 주인공으로서의 강요된 선택을 저지할 수 있다. 화가는 자신의 기예가 원하는 서사를 위해 다가서지 않으며 그리고자 하는 장소를 그리면서 동시에 그리지 않는다. 표면으로서의 물질을 내면의 힘과 등치시킴으로 힘의 역전을 불러일으켜 수용자를 와해시키고, 오늘의 한 인물의 무표정에서 고대로부터의 '블루지한 정서'의 두께를 상상하게 만들며 상품전체주의 시대의 언어를 비극적 언어가 아닌 분열된 언어를 사용함으로 결정을 유보하며 균열을 만든다. 따라서 화가의 그림이 이해하기 힘든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화가는 대상을 그리지만 대상을 따라 과거의 기억들을 불러일으키고 장소를 그리지만 공간 속으로 사라진다. 확증을 바라는 타자들을 끊임없이 기다리게 만들고 엉뚱한 곳으로 데려간다. 특이한 것, 알만한 것, 소비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요구에 확증하지 않으며 화가의 '말(하기)-보여줌'에 대한 기대를 무너뜨린다. 화가의 작업은 매번 노선을 알 수 없는 버스를 타는 것과 같다. 우리의 기대가 무너지고 체념하는 순간 경험의 빈곤에도 불구하고 그 만큼 행복한 순간들로서 다가올 것이다. "오로지 가끔씩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