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무한하게 안으로 확장한다 : 라선영의 존재론
이택광 (평론)
라선영만큼 사물성에 끈질긴 관심을 기울이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초기부터 지금까지 그에게 사물성은 고착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물은 흐른다. 아니 흐르기에 사물이다. 라선영은 사물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한다. 확대가 양적인 증가라면, 확장은 질적인 심화이다. 역설적으로 그의 작업은 양적인 감소를 의미한다. 특히 목재를 사용한 그의 작업들에서 이 확장의 의미는 더욱 두드러진다. 그의 작업은 덜어냄으로써 깊어진다. 사실상 그의 조각은 양적인 감소를 통해 질적인 확장을 만든다. 양적으로 더 작아질수록 그의 작품은 질적으로 더 거대해지고 넓어진다.
<Skin and Flesh>에서 이런 경향은 더욱 솔직해졌다. 이제 라선영의 작품은 가시성의 경계를 넘어 공감각의 영역으로 확장한다. 양적인 확대는 가시적이기에 계측 가능하다. 그러나 질적인 확장은 결코 가시화해서 계측할 수 없다.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을 한 그루씩 양으로 셀 수는 있다. 숲은 양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 나무들의 성장을 양으로 셀 수는 없다. 성장은 질적인 확장이기 때문이다. 밤거리에 늘어선 가로등의 수를 셀 수는 있지만, 그 가로등이 던지는 불빛에 반응하는 우리의 정서를 셀 수는 없다. 이 또한 밀도의 확장이기에 그렇다.
라선영의 작업은 외적 확대와 내적 확장이라는 두 축에 대한 관심이었다. 두 축이야말로 주어진 자리를 벗어나는 사물성의 양태를 보여주는 기준이었다. 예를 들어 목재를 보자. 원목의 규모를 감소시켜서 내적 확장을 도모한 기존의 작업은 개체의 수를 양적으로 증가시킴으로써 외적 확대와 내적 확장의 연관성을 추구했다. 이런 작업은 다분히 현상학적이었다. 모티프는 대상을 만들고 그 대상이 내적 확장을 가져왔다. 그의 작품들은 겉으로 작지만, 그렇기 때문에 안으로 크다.
사물에 내재한 질적인 심화의 의미를 탐구하고자 했던 지난 작업들을 거쳐서 라선영은 마침내 지금까지 세공한 자신의 문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자 한다. <Skin and Flesh>에서 그의 작품들은 장소성에 머물지 않고 그 위치를 벗어난다. 목재는 최소한 양적인 감소를 거쳐서 특정 장소에 서 있다. 그럼에도 이 목재는 더 이상 나무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전 작업과 마찬가지로, 본래의 위치를 벗어나 있다. 이 벗어남이 곧 작품의 기호를 만들어내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런 기호와 의미는 기존의 언어체계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라선영은 이조차도 구속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아예 사물성을 해방시켜 버리려고 한다. 이전 작업에서 우리는 이미 주어진 선입견을 통해 그의 작품을 '해석'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란 약호는 이미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라선영은 이런 편의를 없애버렸다. 그는 우리에게 사물성을 찬찬히 들여다 볼 것을 주문한다. 우리는 사물성 자체에 귀 기울여야 하는 순간 조차도 조급하게 언어로 들어와 있는 의미를 불러내는 습관에 물들어있다. 이와 같은 합리적 이해를 우리는'감상'이라고 부른다. 라선영은 <Skin and Flesh>에서 이런 구태의연한 미화에 도전하고 있다. 얼마나 놀라운 도약인가. 그의 작품은 가시성의 영역마저 벗어나서 확장한다. 개체의 확대조차도 무의미해진다. 위치를 벗어난 소리가 비가시성의 영역을 끌어낸다. 현상학을 넘어선 일원성의 존재론이 이 지점에서 출현한다.
조각은 기본적으로 기하학적일 수 밖에 없다. 사실상 모든 시각예술이 기하학의 문법을 형식의 논리로 채택한다. 그러나 이 기하학의 관념은 그 작품 자체에 내재하지 않는다. 그 관념은 우리의 것이다. 작가는 이 관념을 사용해서 작업을 한다. 그리고 우리 또한 이 관념에 근거해서 특정 작품을 주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우리는 이 시선을 체험적인 것이라고믿지만 앞서 말했듯이, 특정 작품에 대한 의미화는 약호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항상 존재하는 우리의 인식에게 특정한 작품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 대항해서 라선영의 작업은 의미화에 대한 의심을포기하지 않는다. 약호의 확대에 불과한 의미화를 우회해서 라선영은 사물의 존재론을 정립하고자 한다.
우리는 너무도 손쉽게 <Skin and Flesh>를 하나의 '몸'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라선영은 둘의 범주가 결코 하나일 수 없다고 말한다. 둘은 하나를 이루고 있지만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라고 믿는 '몸'이야말로 수많은 내적 확장의 장소일 것이다. 라선영의 '몸'은 이런 의미에서 인식 이전에 존재하는 무의미의 선행성이 아니라, 존재함으로써 사유하는 삶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이 삶 자체에서 무의미는 의미와 일체이다. 무의미가 없다면 의미도 없다. 마찬가지로 비가시성이 없다면 가시성도 없다. 우리가 눈앞에 보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소리'라는 비가시성을 통해 비로소 형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 형체 역시 끊임없이 벗어남으로써, 수많은 가시성을 내적으로 확장함으로써, 존재한다. 라선영의작품에서 가만히 있는 사물은 없다. 끊임없이 위치를 벗어나는 숱한 질감과 밀도의 확장이 그의 작업을 규정하는 독창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