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맑음과 향기
유현경
고통 속으로 뛰어드는 인간을 보게 된다. 그 자신은 그것이 고통인지도 모르게. 그것은 그가 획득할 인간에 대한 이해와 너비를 가져다 주기에 그에게는 앎이자 공부일 것이고 그것들을 몸에 쌓아 자신의 향기로 축적해 간다. 그 향기는 불특정한 어딘가에 닿아 누군가는 그 향기를 누리고 조금은 수월하게 길을 가게 된다.
최근에서야 나의 그림의 여백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여백이 생긴다는 것을 보고는 있었지만 우연이거나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기에 대수롭지 않게 관망했던 것이다.
이우환을 다시 읽었다. 과거보다 수월하게 읽혔다. 그 많은 담론들을 지나 기억에 남는 것은 그의 삶의 이야기였다.
한국에서 태어나 이십 년간 거기에서 자라고, 그 뒤에는 일본에서 사십여 년간을 살고 있다. 또 그간의 삼십여 년을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를 뛰어다니면서 지내왔다.
그 탓인지 나에 대해, 한국에서는 일본 색깔에 젖었다고 하고, 일본 쪽에서는 역시 한국 냄새가 짙다고 하고, 또 유럽에 가면 저 녀석은 역시 동양인이라고 내치고 싶어한다. 마치 탁구공처럼 되받아쳐져야 할 중간자로 몰아세워, 어느 쪽에서도 내부 사람으로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중략) 살아가는 데 있어 소외성의 거리는 아픔이며, 또한 힘이다. 보거나 보이고 있다는 것은 무척 쓰리다. 그러나 이 거북한, 장소 아닌 장소야말로 살아 있는 세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우환, 여백의 예술, 현대문학, 2002 중)
이방인으로의 여정을 살았다는 것과 그럼에도 그 안에서 '만남을 찾아서' 노력하지 않았나 하는 회상이었다. 그 어떤 철학적 담론보다 이 글귀들을 마음에 담았다.
베를린에서 2년을 지냈다. 혼자 있는 평온과 휴식을 만끽했다. 독일로 그간 그린 그림들을 모두 운송했다. 그림을 받고 보니 내가 떠나온 것이 실감되었다. 지난 그림들을 정리할 겸 하나하나 다시 볼 생각이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오랜 기간 하나의 그림 <병원, 2014>만을 보았다. 그간은 무심히 지나쳤는데 이제 붓질 하나도 다시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인지, 아니면 나의 그림 보는 태도가 바뀐 것인지 의아해하며 무엇을 보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 앞에 종일 머물러 공명하고 있었다. 약해져 섬세해진 탓인가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던 와중에 2년만에 잠시 한국에 들어와 너를 만나게 된다.
서울을 지나니 다시 마음이 울렁인다. 도망치듯 산골로 들어오니 밤하늘에 별이 무수하다. 별을 보며 너를 그리워한다. 별이 아름다운 것은 너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니 감사하다.
돛단배가 지나가는 것을 하염없이 보았다. 물위에 돛단배가 떠있고 구름과 함께 느리게 유영한다. 따사로운 해와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평화와 평온을 느낀다. 한가롭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주어진 시간이 무수히 많았음에도 시간은 가끔 지루함이 되기도 했고 해는 더위가 되기도 했고 바람은 차가움이기도 했는데 오늘은 멀리 떠난 너를 생각하며 돛단배가 지나가는 호숫가에 앉아 해와 바람을 따사롭게 맞고 한가로움을 이해할 수 있었다. 너에게 감사하다.
예술과 삶, 이 두가지는 분리되기에 나는 삶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다고 나의 삶의 어설픈 모양새를 항변하고 돌아왔다. 나에게 삶은 너다. 관계를 떠나 혼자 지낸다고 말을 하며 너를 마음에서 놓지 못했다. 내가 가는 모든 길에 너와 이야기 한다. 너에게서 멀어져야 안전한 휴식 임을 알고 있지만 그러지 못한 채 배회하고 있다. 얼굴을 그려도 풍경을 그려도 결국은 너이고 너였고 너가 담기기에 너가 있고 너가 없고 너가 떠나고 너가 들리고 너가 곁에 있는 것이 중요했다.
너의 맑음을 읽고 너의 향기를 느낀다. 나는 너 때문에 죽고 너는 나 때문에 죽는다. 나와 너는 멀리 떨어져 아무도 헤치지 않는 그림을 그리고 아무도 헤치지 않는 공부를 하며 아무도 헤치지 않는 노동을 한다. 그렇게 맑음을 지키고 향기를 기르면 또 다른 너에게 맑음을 보여주고 향기를 건내 줄 수 있을 것이다. 줄 수 있기에 아픈 사람은 모여들 것이고 그것이 진정한 정치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한다기 보다 우리의 향기를 길러 그것이 닿게 할 수 한다면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혼자 있어도 곁에 있는 것 같을 것 같다.
너의 향기를 느끼며 여백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여백을 보게 된 것은 그 전부터 시작된 것 같지만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여백 임을 알게 된 것은 너에게서 향기를 느낀 순간인 것 같다. 맑음은 멀리서도 어렴풋하게나마 볼 수 있는 것 같고 향기는 가까이 곁에서 맡아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의 여백이 향기를 인지하고부터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 그 여백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의 언제부턴가 그림을 그리고 나의 그림 안에서 쉴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보는 것이 좋아져 작업실을 찾곤 했으니 과거에 그리고 회피했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과거의 그림들 중 오래 볼 수 있는 그림이 남아 그 여백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의문이다. 모르고도 했다. 그것은 일견 비우면 될 것 같지만 꼭 그렇지 않았다는 것에 다시금 의문이 생긴다. 다시 독일에서 오랜 시간 본 지난 그림 <병원. 2014>으로 돌아가자면, 이것은 비교적 채워진 그림인데 여백이라니. 내가 본 것은 무수히 많은 선 뒤의 공간과 공백이었던 것 같은데 그럼 이 선들은 해체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최근의 그림 한점이 그것과 유사하다.
여백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다행이고 감사한 있는 지금, 나의 그림의 여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우환 선생님은 최근 본인의 그림의 여백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계실까. 묻고 싶다.
세계에 대한, 여백에 대한 나의 이해와 시각은 아직 모두 너에게서 온다. 너의 맑음을 찾고 너의 향기를 따라 간다. 나를 알 수 없기에 너를 읽고, 나의 향취를 맡을 수 없기에 너의 향기를 쫓는다. 심미를 읽고 그 심미를 만들어야 하기에 오늘도 너의 향기를 쫓는 이기적인 길을 선택한다. 나, 그리고 내 마음 안에서 가능할 것 같았던 일은 모두 실패했다. 너의 맑음과 향기에 취해 지난 너를 잊는다. 세계에 대한 이해가 너에게서 오지 않는 날이 오면 그때는 너를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은 너에게서 배운다. 너에게서 벗어나려 무단히 애쓰고 있으니 언젠간 다른 시기가 올 것이라 믿는다.
맑음은 누구나 지니고 있었다. 맑음을 알고 향기를 고취시키는 것은 포용을 통해서 가능하다. 많은 것을 포용할수록 고통이 따른다. 힘들지 않은 개인을 본적이 없다. 삶은 모두에게 공평히 외롭고 힘들다. 모두가 삶의 어려움 속에 꿋꿋이 생존해 있다. 버티고 있는 그것이 그들의 맑음이다. 모두가 어렵다는 것을 이해하면 배척과 금지 보다는 허용과 관대가 필요한 것 같다. 그러다 자신의 몸이 망가지는 무모함은 경계해야할 것이지만. 나는 약하거나 약해졌다. 이것을 인정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포용할 수는 없겠지만 배척하지 않는 것, 편에 고립되지 않는 것을 지킬 수는 있을 것 같다. 그것이 약함을 받아들이고 들꽃처럼 살라는 말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약함을 인지하고 보니 그를 매개로 칼을 휘두르지 않게 조심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