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해-장편소설
어느 날 불현듯 시작된 한 줄의 글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장편의 소설이 되었다.
'우리는 왜 행복하지 않은가?'로 시작된 물음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가다가, 이제는 그 끝을 알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만다. 과연 이것은 역시나 한 줄의 '답'으로 마무리 되어질 수 있을까?
내가 나를 마주할 때의 불안, 나와 타자/사회가 서로를 마주할 때의 불안이 어떤 다름의 이야기들을 만들어 가는가. 어떠한 충돌의 파편이 튀는가. 그것은 무엇이, 왜, 어떻게, 그래서로 이어져 가며 그렇게 서로의 거울에 각자의 모습을 투사시키고 있는가를 이야기해왔다. 처음에 이러한 portrait을 보였을 때, 누군가 이를 '괴물'이라 말했고,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괴물'로 보이고 있구나, 혹은, '괴물'로 여겨질 것을 두려워하고 있구나 를 생각하였다. 불안은 또 다시 그렇게 불안을 이어나간다. 괴물은 괴물을 만든다.
근래의 portrait들은 새로이 가면이나 해골을 얼굴의 위치에 대신한 것들이 많다. 여러 가지의 상징적 당위성을 설명할 수 있으나, 그보다 가장 첫 번째의 이유는 '다작을 위한 모델의 수급' 의 문제에서 시작된 '스스로 모델 되기'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혹자들은 그간의 본 작가의 그림들을 '자화상' 이라 하여 자기애나, 자기복제 등의 의미로 읽기도 하는데, 그보다는, 다작을 하다 보니 그만큼의 많은 모델을 결코 수급할 수 없던 현실과 더불어, '불안'을 그려내는 그림의 모델을 충분하고 쉽게 구할 수 없던 현실에서 시작되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근래에는 굳이 내 스스로의 얼굴을 빌지 않더라도, 툭 던져둔 가면이나, 해골이나, 무엇이나 눈코 입의 형태를 갖추거나 (갖추지 않아도) 충분히 무수한 표정들을 그려낼 수 있음에 시작된 시리즈라 할 수 있다.
본 작가는 자화상을 '내 얼굴을 사용한 타자들의 페르소나' 라 부르곤 하여왔다. 페르소나가 '가면'을 의미한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또한 '가상적 존재' 라고도 하니 나의 '장편소설'에 적합한 등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주로 portrait을 작업해 오던 것에 더불어 한켠으로는 불안의 정물, 불안의 풍경의 시리즈를 함께 만들어가고 있다. '인물'이 불안으로 만들어진 '결과'적인 모습이라면, 정물과 풍경의 시리즈는 '무엇이/어떻게' 불안을 야기하는가의 '원인'적인 이야기의 은유라 할 수 있다.
이번의 전시에서는 위의 인물과, 풍경, 정물을 함께 보여주려 하고 있다. 본 작가의 기나긴 '장편소설'은 그간 등장인물들로서의 실존의 불안들을 이야기해왔더라면, 이러한 풍경과 정물의 등장은 어쩌면 '프리퀄'에 해당될는지도 모른다. '왜? 어떻게?' 의 요소로서의 등장이 뒤늦으니 말이다.
'언제까지 이런 그림을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할거?' 라고 간혹 던져지는 물음에 답한다.
"몰라요."
이 장편 소설은 내가 '그' 무언가의 답을 알고 시작한 것이 아닌, 답을 알고 싶어 시작한 그것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