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춥고 눈이 내리던 겨울 날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베를린의 어느 주점에서 색소폰, 베이스, 기타로 구성된 재즈 트리오가 연주를 하고있다. 눈에 띄게 한산한 그곳에서 몸을 녹이려고 위스키를 한 두잔 빠르게 들이켰다. 음악은 혈관을 타고 흐르는 술기운처럼 어느새 전신으로 번진다. 눈을 감는다. 듣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슴을 가득 채우는 저 소리. 그것을 어슴푸레한 어두움 속에서 울리게 해야한다. 내 안의 모든 것이 용해되는 야음의 침묵 속에서. 그런데 늪처럼 깊이와 양감을 지닌 내부에서 무언가 어른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은 두려운 낯익음. 마땅한 이름을 부여 받지 못한 희끄무레한 어떤 것. 천천히 눈을 뜨자 무대 위의 트리오와 높은 천장 사이의 허공에 형체가 있기도 없기도 한 물체가 정령精靈처럼 떠다닌다. 최면이라도 걸린 듯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그것과 나는 둘이 아니었다. 환영이라도 본 것일까? 설마 저것이 바로 내가 그토록 찾던 음(스윙)의 현현이었던 것인가? 문득 떠오른 이런 생각이 그 물체로부터 나를 분리시킨다. 갑자기 사진 촬영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테이블위에서 잠자고 있던 카메라를 낚아채어 부랴부랴 세팅을 하자마자 무대를 향해 겨눈 뒤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리고 천천히 셔터를 눌렀다.
나는 매우 예민한 귀를 타고났다. 주로 시각을 써서 얻은 이미지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된 지금도, 남다르게 예리한 청각은 나의 시감각기를 압도한다. 내가 소리와 피사체를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 할 수 있는 것도 그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모체를 벗어나 인간으로 태어난 뒤에야 비로소 눈앞에 펼쳐지는 가시적 세계와는 달리 소리는, 또 그 파동은, 탄생 이전의 유체幼體를 직접적으로 감싸고 두드리며 흔든다. 바닷속 같은 어둠 속에 무방비로 노출된, 몸을 웅크린 태아에게 소리란 어쩌면 공포일 것이다. 눈꺼풀을 닫으면 차단되는 이미지를 관장하는 감각기관과 달리 귀는 늘 열려있다. 어떤 소리도 막을 수가 없다. 쉴 새도 없다. 잠자는 동안조차 귓속으로 온갖 소리가 밀려 든다. 아직은 한 번도 세상을 목격하지 못한, 눈을 감고 있는 존재의 뇌리에 낯선 영상이 맺힌다. 그것은 소리의 형상이다. 음은 이미지의 기원이다.
대기를 타고 귀에 와 닿는 소리와 양수 안에 도달한 소리의 진동은 다른 것이지만 나는 온전한 사람이 되기 이전의 생명체일 때부터 재즈 음악을 접했던 인연으로 그 음악장르를 다루는 작가가 되었다고 믿는다. 이 음악은 마치 또 하나의 혼처럼 내 안에 서려있다. 그러나 재즈는 내게 종종 두려움이었다. 한 번 빠져들면 헤어나올 수 없는 미궁이라고 느꼈기에 그것이 놓인 지점에서 가장 먼 곳으로 달아난 것도 여러 번이다. 삶의 여러 길목에 도사리고 있는 모순적 미혹. 그것은 선원들의 귓구멍에 밀랍을 넣어 막아버리면서까지 듣지 않으려고 애쓴 세이렌(Σειρήνες)의 노래였다. 그러나 별들조차 자신의 어둠속으로 사라진 무수한 밤이 지나고 처음처럼 여명이 찾아온 어느 날 남풍은 내가 탄 배를 결국 섬(Anthemoessa)으로 이끌어 주었다. 이윽고 바람이 멎고 바다 위엔 잔물결조차 일지 않았으며 배는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황금빛 햇살 속에서 멈춰 섰다. 나는 노래가 시작되면 소리를 지르며 자신을 결박하고 있는 밧줄을 풀어달라고, 그리하여 당장이라도 자신을 사로잡는 저 요사스런 음악에게로 달려 가겠노라고 애원한 이타카의 왕처럼 돛대에 묶인 채 저 곡조를 낱낱이 귀에 담았다.
재즈는 과녁으로 변죽을 울리는 역동적인 루바토다. 바람이 숲을 가로질러 나뭇가지 사이에서 춤을 추면 나무는 요동하지 않아도 나뭇잎들은 생기 넘치게 흔들린다. 그런 흔들림이 스윙이다. 시간과 마찬가지로 이 음악은 무방향성이며 회선廻旋의 원무圓舞이다. 나는 귓전을 안개처럼 떠도는 성스러운 기억에 기대어 눈으로 소리를 좇는다.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암부暗部의 적도선을 지나게 된다. 범음(凡音)을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는 거친 물살의 해협을 통과해야만 도달하게 되는 닉스의 봉토封土. 그곳이 바로 스윙이 잉태되는 포궁胞宮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프로테우스적 음율과 밤闇의 유대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코펜하겐에서 마주친 함머스호이의 화폭에 인화된 촛불 켜진 실내의 짙은 그늘 속 선율을 상기하기 위해. 어둠의 문턱에 서서 보았던 잃어버린 풍경들과 부속음을 소환하기 위해. 밤의 경계에서 귀는 가장 기민해진다. 색이 말을 잃고 오래된 음성으로 노래하는 시간. 채도를 실상에서 분리하고 남은 증류된 정경이 그 안에 있다. 색을 여의어야만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색채보다 선명한 광휘를 품고 있는 이미지. 나는 그곳에서 울려오는 순수한 음(mousikē)을 숨죽인 채 미행하며 활 시위를 당긴다. 결코 습득 되는 언어가 아닌 그 소리가 택한 장면들은 시간과 더불어 겹겹이 쌓여 다중음의 산맥으로 융기 한다.
퇴적된 어두움은 멀리서 들리는 메아리다. 마치 살갗 아래에서 간질거리는 듯한 Wie aus der Ferne의 노래이며, 오래된 상흔의 질기고 무딘 통증 같은 노스탤지어다. 나의 사진에 복제된 그 명암冥闇이 이런 은밀한 소리들의 내면을 최대로 증폭한다. 코앞에서 듣는 멜로디보다 아득할지라도 기실 더 크게 마음을 뒤흔드는 음악. 그것이 나를 사로잡는, 또 내 사진이 사로잡으려는 재즈의 본질이다. 무색의 지평 위에서, 그 시각의 정적 (Ah quelle tranquillité!) 안에서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는 반음계 음색의 만화경 속 세상. 먼발치에서 쿠르릉 쿠르릉 번쩍거리는 천둥소리와 닮은 포이에시스 (Poiesis)가 계조의 층위마다 포개어져 있다. 음音과 상像이 상호삼투하는 저 초음향적 풍경은 다름아닌 모노크롬의 본령이다. 그곳은 또한 내 사진이 나고 자란 애틋한 고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