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불안
시각예술의 진리
풋풋하고 싱그러운 청년의 모습부터 점차 비대해지고 탄력을 잃고 쳐지며 머리카락이 빠져 초췌하게 늙어 가는 본인의 모습을 지독히도 아름답도록 그린 렘브란트, 그의 자화상은 거스를 수 없는 유한한 시간 앞에 변해가는 모습이 서글프긴 하지만 죽음과 노화에 대한 슬픔이 낙담 되어 우리를 침잠시켜 버리지는 않는다. 유한한 시간과 생명, 그 거대한 물리적 흐름 속에서 변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만의 방식대로 탁월하게 재현한 그의 작품은 우리를 부드럽고 격식 있게 인간의 모습을 통해 이에 연관된 세계관까지 생각하게 한다. 자코메티의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 가느다란 인체 형상은 군더더기를 모두 제한 후 인간의 실존적 물음을 우리게 건네며 깊은 내향적 통찰을 이끌어 낸다. 잔혹한 현실 속에도 처절하게 끈질긴 삶의 의지를 참담하게 묘사한 콜비츠의 참혹한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 약한 인간의 몸에서 열정과 사랑의 힘으로 뿜어내는 에너지가 경이롭게 느껴지는 경지로 몰아붙이는 프리다 칼로의 작품, 시각예술에서 환청이 들리는 듯 혼란스럽고 절망적이며 암울한 감정을 요동케 하는 뭉크의 작품 등은 마주하기 힘든 인간의 본성과 본능을 우아하고 격조 있게 대면하게 한다. 유쾌하지 않고 즐겁지도 않으며 만족스럽지도 않아 마주하기 꺼려지는 인간의 약한 본성 혹은 본능이기에, 외면하거나 도피하지 않도록 깊은 통찰을 끌어내는 시각예술만의 우리를 설득하는 대체 불가한 우아한 소통 방식일 것이며, 이것은 시각예술이 지닌 '진리'일 것이다.
불안의 시각예술적 징후와 표정들 : 장난끼 서린 냉소, 화려함 속 잿빛, 공포에 질린 경직, 생존을 위한 미소 그리고...
최병진 작가의 작업들에서 '불안'의 시각 예술적 징후들은 다양한 표정으로 발현되어 왔다. 2007년 그의 첫 번째 개인전에서 보인 작업들은 장난끼가 탑재된 산뜻하고 유쾌하게 보이는 형상들이다. <용팔이>, <십이지>, <십장생> 등은 늠름한 속에 익살스러움이 있고, 트로이의 목마·사과·피노키오·악어의 눈물 등으로 구성된 는 여러 캐릭터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초현실적 몸체가 둥둥 표류하는데 하나하나 캐릭터들을 발견해 해석하는 재미와 더불어 기묘한 상상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회화가 가진 고유한 엄숙함과 근엄함에 대한 젊은 아티스트의 엉뚱하고 재기발랄한 반문의 작업이다. 장난끼가 서려 있지만 회화예술이 지닌 진정한 아우라에 대한 또 다른 방식의 입증으로도 보인다. 이후 2012년 전시에서 보인 작업에서의 조형 양식은 초상화로 구체화되면서 내재된 개인의 불안함은 다채로운 색으로 재현된다. '나는 누구고 이 사회 속에서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라는 존재감에 대한 불안과 답답함이 형형색색의 규격화된 패턴에 회색빛의 얼굴을 병치시켜 우울감과 상실감이 상대적으로 대비되어 부각된다. 읊조리듯 자조적인 내향적 시선의 방향이었던 작업은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면서 그 안에서의 괴리감을 작가 스스로 적합한 표현을 찾아보고자 한 시도로 변화된 듯 보인다. 그렇기에 두 번째 개인전 제목인 '문 없는 방'은 갇혀 있어 답답한 잿빛 표정의 인물이지만 이에 대비되는 오방색은 반복되는 일상의 삶을 패턴화하여 매일 삶을 살아내는 인간의 생명력과 의지를 경외하며 그려낸 작가의 따듯한 시선이 느껴진다.
"주변의 풍경이 익숙하고 편안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나는 불안하다. 세상은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점점 명쾌해지지만 한편으로는 공포적인 방대함으로 감각을 마비시킨다. 짙은 안개 속을 헤매듯이 아무 것도 실재가 아닌 느낌이며 이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하는 극도의 불안을 야기한다. 하지만, 불안이 엄습할 때 짙은 안개에서 같이 길을 더듬고 있는 다른 무언가가 느껴진다. 인간인지 괴물인지 생물인지 무생물인지도 모를 무언가가 나와 같은 처지에서 길을 헤매고 있다. 정확한 인식이 힘들어 무섭기도 하지만 그저 같은 처지라는 사실이 위안과 알 수 없는 용기를 준다."
-작가 노트 중-
이때 작가는 '밀폐'와 '개방', 두 개념을 작업에 함유시키는데 짙은 안개 속을 헤매듯 사회를 '밀폐'된 공간으로 설정하고 그 안에서 정체성을 고민하고 또 다른 존재를 느끼는 과정이다. 모호하고 답답한 개인의 내적 상황을 암시함과 동시에 같은 처지에 길을 헤매고 있는 타인(대상)의 존재에 대한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며 엉켜버린다. 즉 '밀폐'와 '개방'을 공존시켜 스스로 고립되지 않고 대상과 맺은 동질감에 작가는 힘을 받는 것이다. 이때 그가 설정한 '불안'도 작가의 고유하고 특수한 -예술가로서의- 심리적 경험치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보편성을 갖게 된다. 밀폐와 개방을 통해 작가가 설정한 코드로 억지스럽지 않고 부드럽고 자상하게 우리를 설득해 오히려 아늑한 공간을 조성한다. 그가 작업 노트를 통해 자주 언급하고 있는 단어들 덩어리, 뭉개버림 등이 이를 입증하는 그의 조형적 공식이다.
"내 감각에 새겨진 그 공포의 각인은 이제 수시로 느껴졌다. 나를 포함한 내 주변을 모두 물들였다.
어디에도 피할 곳은 없었고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숨을 쉴 때 마다 숨이 짧아지는 아이러니한 공포, 믿었던 공기는 나를 배신했고 배신을 들키자 점점 그 탁하고 오염된 모습을 드러냈다.
서서히 모든 것은 회색의 암흑 속으로 빨려들어 갔으며 나의 감각은 무력함에 마비되어 손가락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완전히 잠식당했다."
-작업 노트 중-
이후 2015년부터 2018년에 보이는 일련의 작업들은 초상화와 군상화로 형식이 나눠지고 '강박'과 '콤플렉스'가 화두가 된다. 초상화의 작품명은 모두 숫자로 매겨지고 얼굴과 몸은 작품 속 배경으로 결박되어 보이거나 견고한 틀에 얼굴이 잠겨 있는 듯 보인다. 인물의 표정은 눈·코·입이 덮여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거나 보여도 인간의 모습이 아닌 도식화되어 창백하다. 현재 작업들의 기저 및 단초는 2015년부터 시작된 작업들에서 명확히 보여진다. 강박이라는 신체적 증상의 순간을 표현하려 했던 초상화 작업은 시간이 지나면서 형태가 변모해 간다. 이런 변화는 강박에서 좀 더 일반적이고 만성적인 개념인 '불안'으로 전이된다.
"불안은 안정을 추구하는 몸의 요람을 엇박자로 흔들어 안락함에 균열을 일으키고 몸을 감싼 환경이 언제나 나에게 호의를 베풀 것 같다는 유토피아적 망상에 망치질을 하며 불시의 위협에 신체는 각성되어 생존을 위한 프로세스를 가동한다."
-작업 노트 중-
2023년부터의 작업들은 초상화 위주의 작업들로 더욱 집요해진다. 인물들의 얼굴은 전보다는 원만한-여전히 일부 가려있지만- 표정이 드러나며 환경과 배경 속에 결박되어 있었던 인간의 모습은 유연하고 다채로운 형태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인물의 주변을 구성하는 형상은 외부 환경으로부터 옥좨오는 결박의 형태라기보다 오히려 피부가 풍화되어 확장된 듯 보여 그의 언어대로 불안이 장식된 것으로 보인다. 이번 개인전에서의 작품들은 그간 최병진 작가의 불안의 여러 표정이 보여진 여정 속에서 고민해 온 요소들이 함축되어 견고하고도 수려하게 확장되어 보인다. <044>, <045>, <046>은 배경과 인체가 섞여 결박과 풍화의 그 어디쯤에서 경화되어-가는 과정이 보여지고-있으며, <047>, <048>, <049>, <050>, <051>, <052>는 반복되는 패턴화 된 일상 속에 살아내고 있는 인간의 삶의 의지가 인체의 피부가 펼쳐지듯 전개되어 확장되고 있으며 <053>, <054>, <055>는 사물과 섞여 화석처럼 붙박이로 굳어진 사물화된 인체의 모습이다. 인간은 독립적인 존재지만 생존을 위해 변화하고 환경과 상황에 맞도록 놀라운 유연함으로 설정이 되며, 늘 무언가와 관계를 맺고 엉겨서 생명이 지속되는 생태가 최병진 작가에 의해 구성되고 구축되고 있다. 근래 작품에서는 예전에 작가와 작품과도 녹진하게 엉겨있었던 시기로부터도 변화된, 한 발짝 거리를 둔 느낌으로 다가온다. 작품 속 결박되었던 인체는 작가의 경험상 징후를 대변하여 재현된 작가의 심상이었다면, 지금 작업들은 '불안'의 '진리'를 덤덤하지만 화려하게 전개해 나가는 것으로 보여진다.
불안, 그 우아한 표정
그의 작품이 극단적인 불안이 형상화된 표현임에도 숨이 막히거나 갑갑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작품에 골몰해 두려움 없이 그 심연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이유는 명확히 있다. 홀로 고립되지 않고 그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개방의 공간이 작품 속에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작가 입장에는 그것이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한 장치일 수 있고 또 한편 스스로 생존하기 위한 그만의 방편일 수도 있다. 생존을 위한 사이렌의 역할을 우리의 뇌가 건실하게 수행하는 과정이 '불안'이고 스스로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라고 한다면, 인류는 생존하기 위한 각개전투가 아닌 '함께', '같이' 고군분투하며 진화의 역사를 만들어 왔을 것이다. 최병진 작가의 작품에는 '불안'의 개념과 더불어 작업 기저에는 '관계'가 더 깊이 내제되어 관계를 통한 삶의 통렬한 의지가 숭고하게 재현되고 있다. '불안'의 신체적 징후를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넘어 불안이 지닌 진리를 최병진 작가는 우리에게 제안하고 있다. 하이데거의 개념대로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라는 존재는 세계에 던져졌고 허무한 세계 속에 있는 나는 세계의 구조 안에 관계를 맺고 있는 허무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흐르는 시간 속에는 모든 것이 유한(죽음)하기 때문에 이 안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야만 한다. 생존을 위한 '불안'의 징후와 '우울'과 '광기'는 의식의 층위가 아닌 무의식에 가깝고, 의식은 시간을 인식하지만 무의식은 시간을 배제하기에 창작자의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낳은 예술 작품은 퍽 유감스럽게도(?) 바라보는 우리에게는 아름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병진 작가의 작품에서 '불안'의 징후가 어떻게 재현되었는가를 넘어서 생존을 위한 인간의 본능에 대한 진리를 그의 작업에서 발견하는 것이 더 중요한 듯 보인다. 무엇으로부터 왜 그러한 의식이 드는지, 유한한 세계 속에 경험하고 관계한 모든 것에 대해 몰입하고 상념 하는 것, 이것이 최병진 작가가 우리에게 건네는 불안의 표정이자 진리일 것이다.
작가가 겪은 개인적 경험,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불안은 그 시기에 그의 진실(인간적으로도 예술가적으로도)이 가장 잘 표출되는 순간이다.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각자 나름의 불안을 상기하고 제대로 마주하며(도피하지 않고) 자신만의 진실과 대면할 수 있으며 그 불안의 시간을 잘 지탱(마주)함으로써 삶의 새로운 층위로-존재론적으로는- 본래적 실존을 마주할 수 있는 통로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불안이 엄습할 때 온전한 나만의 내면으로 가는 통로가 열리는 때이기도 하며, 이미 스스로 혹독하게 내면을 마주한 작가는 우위에 서서 우리에게 그의 언어로 부드럽게 설득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회화예술의 진정한 진리 즉 아우라는 이토록 우아하게 우리에게 본래적 삶의 진리와 본성을 묻는 것에 있는 것일지도.
고연수(미술평론)